Ouzi ZUR - review
   
       
 
 

서문

만약 이스라엘이 스스로 의지박약 때문에 또는 부득이한 이유로 소멸되어야 한다면 , 영구적인 무언가―언어, 예술, 문화―가 뒤에 남을 것인가, 아니면 일체 모든 것이 깊은 망각 속으로 가라앉을 것인가? 앞으로 우리는 이 질문을 단지 이론상으로 전개해서는 안 된다. 대신,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에게 각인된 이 공포, 이 현실, 이 땅에서 생긴 일과 이 땅을 지구상의 여느 지역과 다르게 만드는 일들이 지금도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채, 꼼꼼히 이 질문을 살펴야 한다. 아마도 이것은 더 큰 질문, 그로부터 모든 존재론적 질문들이 파생되어 나올 또 다른 질문의 일부일지 모른다. 곧, 이스라엘은 실재하는 공간인가, 아니면 여전히 유령 같은 환영인가?

이스라엘은 내가 ‘외부로부터' 본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장소이다 . 나는 상상 속에서나 ‘이스라엘' 을 경험할 뿐, 보지는 못한다. 내가 경험하는 장소는 유동적인 곳, 수은만큼이나 변덕스러운 곳, 고정될 수 없는―또는 그것을 거부하는―곳, 거주자 대부분―이민 1,2,3세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곳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끊이지 않는 갈등이 추가될 수 있다. 이 갈등은 떠돌이 생활과 고통, 억압, 저항, 상실, 공포, 편집증, 홀로코스트라는 검은 연료, 고립주의, 소속감, 결여된 또는 과도한 자신감, ‘다시 그곳'으로부터의 기억, 열망, 혐오의 기억 등이 낳은, 그리하여 거대한 에너지가 마치 고압전류처럼 흐르는 용암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젊은, 혹은 그다지 젊지만은 않은 모든 예술가 세대가 이 에너지로부터 자양분을 얻어 왔으며, 더 이상 그것을 쫓을 수 없어 거리를 두는 동안에조차 그들은 가끔씩은 충전을 위해 이곳을 다시 찾을 필요가 있었다. 이런 종류의 에너지는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그것을 사용하는 이들을 파괴할 위력을 지녔다.

나는 현대 이스라엘 미술의 이목구비를 마치 장님처럼 손으로 더듬어보고자 한다 . 이스라엘 미술의 다양한 요소들을 하나로 아우를 만한 공통된 특징을 찾기란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들이 저 내부로부터 끓어오르고 있음을, 서구문명―자신이나 자신의 부모, 조부모를 추방한 대륙의 품으로 되돌아가고픈 마음에 그토록 이스라엘 예술가들이 갈망하는 세계―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에게만 가둬 놓았던 놀라운 생명력과 내면의 불길이 표면 전체를 고루 뒤덮고 있음을 손끝으로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여기, 동양에서 우리는 당신네들만큼이나 유럽적이다.”

좀더 깊이 살펴보면 이스라엘 미술의 좀더 오래된 원천이 발견될 것이다 . 디아스포라와 유대교가 그것이다. 성경에 최초로 등장하는 예술가 브사렐이 제작한 성막 안에 있던 저 먼 과거의 그릇 파편들이 그랬듯, 브사렐 미술학교에서 제작된  유다이카 (제의 용품, 일상 용기, 장식된 기도서 등)는 언제나 타 문화권의 영향 아래 있었다. 이 가운데 일부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외적 장식물의 영향을 받은 세속 이스라엘 미술의 몇몇 영역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장식물들은 기록된 말씀 상으로만 존재했고 외관은 거의 완전히 무시되다시피 했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유다이카는 ‘신비주의적' 상징으로 대표되는 외적 재현물이며, 대부분 빈약한 상태로 남아있다. 이스라엘 내부의 서구 세속주의와 그것의 실질적 연관은 미비할 뿐이다.

유다이카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문화적 삶에서 외적 장식물이었고 ,  “새긴 우상이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는 성경의 규정(하느님의 말씀)을 따랐다. 이스라엘의 예술가 세대는 이 유대교를 탈피하고 ‘이방의' 외적인 창조 세계를 만들기 위해 기록된 말씀을 져버리며 등장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젊은 세대들은 말씀과 우상의 투쟁―이미 여기 존재하는 긴장을 넘어 또 다른 창조적 긴장을 낳는 투쟁―으로 되돌아갔다.

지금껏 이스라엘 문화적 삶의 한 가운데에 자리한 불변의 ‘사라진 유럽주의' (현대 미국주의에 의해 희석된)의 횡포가 없었다면, 그리고 이슬람 국가들에서 온 이들의 문화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은 동서양의 사이에서 존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한국은 이스라엘 오리엔탈리즘 너머의 동양―이스라엘 미술이 지금까지 거의 소개되지 않았던 동양―이다. 한국은 유럽/미국 너머의 지평인가?

 

Romy ACHITUV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 내리는 , 실제적인 것과 디지털적인 것 사이 어디엔가 존재하는 황폐한 비처럼. 글자-단어-문장들을 무한 증식시키는 거울들처럼. 깨끗이 정돈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길거리 개들처럼 전복적이고 자유로운 꿈의 문장들. 실재와 환영의 경계 지역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은 손에 쥘 무언가를, 직접 얻을 수 있는 위안거리를 찾는다. 하지만 그들의 언어는 프로그램된 문법 공식 속에서 서로 뒤섞이고 융합된다. 로미 아키튜브의 작업은 브라우저 시대의 언어학이며, 일종의 21세기형 바벨탑이다. 이 언어의 암흑시대에, 그 안에서는 버튼 하나만 누르면 비록 언어들이 디지털 통로를 교차하는 동안 그 안에 담기고 그 안에서 들려오는 내적 의미, 감정의 본심, 문화, 관습은 잃을지언정, 모든 언어를 해석하는 것이 가능해 보인다.

아키튜브는 문자언어를 변형시키는 데서 나아가 , 언어의 일부가 되는 삶의 방식, 사회적 ? 문화적 코드를 원래의  환경에서 낯선 환경으로 바꾸는 작업을 시도한다 . 그리고 이 변형과정에서 나타난, 또는 그 안에 내재했던 소외와 낯설음을 의도적으로 유지한다. 그리하여 프로모션 캠페인 중인 한 소녀가 제 자리에 서서 자신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군중이 모인 곳에서 , 어느 텍스트를 낭독하기에 이른다. 외국어 텍스트는 그녀와 그에게 각각 자연스러운 환경들 모두에서 읽힌다. 소녀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낭독이 포함된 전시를 보여주기 위해 그곳에 ‘수입'되었다. 발표를 하는 소녀와 발표되는 텍스트의 차이 때문에 우리는 두 장소 모두에서 외국의 낯설음을 경험한다. 전지구적 네트워크에서 세계는 리얼리티를 빼앗겼다. 문어와 구어는 이른바 단어들, 용어들, 사유의 다발이 된다.

Yael BARTANA

긴 시간의 벽을 뚫고 튀어나온 검투사처럼 , 그들은 남성적인 야외용 탈 것 안에 몸을 싣고 무심한 바다 앞에 펼쳐진 석회암 언덕들과 싸움을 벌인다. 야엘 바타나는 현대적 제의들을 마치 부족 의식이나 되는 양 인류학 영화의 분석적 양식을 빌어 심도 있게 기록하되, 한시도 미적인 추구를 놓치지 않은 영화를 만들었다. 가공되지 않은 현실에 사진 및 편집 조작을 거친 바타나는 이렇게 다큐멘터리적 원재료를 이용하여 인간문명의 경계선에 있는 사회의 고대의식을 만들어낸다. 그녀의 작품에는 최면이라도 걸릴 듯한 태곳적 힘이 도사리고 있다.

외부 관찰자의 눈으로 보면 이 모터 달린 동물들은 어딘가 모호하고 이해 안가는 면을 지니면서   동시에 아름답기도 하다 . 마지막으로 해변에 던져진 멸종 바다거북처럼, 그들은 각자의 껍데기를 남긴 채 떠난다. 숨을 조일 듯 박진감 넘치는 사운드트랙이 동물적이고 원시적인 둔중함을 동반하며 귓전을 울린다. 아름다운 매 프레임들이 속도를 더해가며 이 수컷들의 싸움을 신화적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자동차들이 빛과 어둠 사이로 불빛을 비추면,   펠리니 감독의 <사티리콘>에서처럼, 호전적인 스파르타인이 환생한 것처럼, 흡사 로마를 방불케 하는 분위기가 경기장에 내려앉는다. 자동차 불빛은 언덕의 촉감을 바꾼다. 언덕은, 마치 풍경의 갈비뼈가 노출된 듯 벌거벗는다.

 

Amnon BEN-AMI

암논 벤아미는 각 사물에게 할당된 역할로부터 사물의 유적들을 탈취해왔다 . 그리고 색채와 재료를 이용한 지적이고 아이러니한 게임을 통해 사물을 그것의 익숙한 존재의 껍데기, 원재료로 바꾸거나 재탄생―미적 부정을 위해 제 용도를 잃어버리고 또한 매우 굶주린 존재로―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회화와 조각, 순수미술과 디자인, 아름다움과 추함 사이의 좁은 경계선 위에서 뒤죽박죽을, 콜라주를, 프랑켄슈타인적인 악몽을 만든다. 다시 말해, 그의 말을 빌자면, “작업은 가능한 한 예술작품처럼 보여선 안 된다.”   <두 사람을 위한 물어뜯기 장치>를 보라. 이들은 끊임없는 고통 때문에, 지극한 쾌락 때문에, 아니면 둘 다 때문에 물어뜯고 있는가? 그 두 사람을 보라. 이들은 서로에게 고통을 주는가, 쾌락을 주는가, 아니면 한 사람은 고통을, 다른 사람은 쾌락을 주고 있는가? 이 관계에서 해결책이나 만족, 균형을 찾는 것이 가능할까? 이 작품의 모습에는 힘의 균형이 표현되었을지도 모른다. 쇠락해가는 제 1세계의 퇴폐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제 3세계의 작업장에서 생산된 조악한 산업제품의 모습이 그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멸종된 동물의 해골에서 얻은 얄따란 물질로 만든 장님용 지팡이가 있다 . 끝부분에는 검은 고리들이 인쇄되어 있으며 이 고리들은 더 많은 연결은 나타낸다. 이것은 감각기관 가운데 하나를 잃어버린 누구, 어느 육체와의 매우 가늘고 시적인, 칼날처럼 정밀하고 날카로운 연결이며 상실의 함축, 연장, 보상이기도 하다. 어디가 ‘자연스러운' 끝이고 어디가 ‘인공적인' 시작인가? 이 작품은 감동적이면서도 동시에 냉소적인, 그러면서도 자신의 예술성을 부정하는 ‘약한 미학'을 실천한다. 작품은 외과의사와 같은 정밀함으로 신체 손상과 그것의 미적 공헌의 경계를 분석한다.

이번 전시에 참여하지 않은 뛰어난 작품 가운데 나무를 직접 깎아 제작한 거친 외바퀴손수레가 있다 .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만든 사랑스런 장난감이다. 손수레에는 괴상한 안내서에 실린 도판처럼 보이는 도면 두 장이 붙어 있다. 물구나무서기 자세로 걸어가는 한 사내가 자신의 두 발로 다른 사내를 수평으로 들고 있는 그림이다. 이 두 사람이 인간 외바퀴손수레이다. 인간의 모습으로 재탄생된 정물이 표현수단―드로잉 그리고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작고 정밀한 물건― 속에 이중화되고, 이중으로 반영된다.

 

Guy BEN-NER

가이 벤네는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삶―직계가족을 거느린 창작인―의 이모저모를 배를 움켜쥐며 웃을 만큼 유머러스한 멋진 전설 시리즈로 둔갑시킨다 . 가이는 한 남자, 한 아버지, 한 사람의 예술가,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필요한 것을 얻고 나면 곧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 되는 그 자녀들 사이의 긴장을 다룬다. 이 오이디푸스적 긴장을 벤네는 코믹한 막간들로 바꿔놓고자 한다. <모디 딕>에서는 아버지와 딸 사이에 숨겨진 성적 긴장―이야기 틈바구니에서 여성, 어머니를 화면 밖으로 밀어내며 등장하는 긴장 ―이 보다 첨예해진다.   그리고 이 긴장은 역할극 게임으로 전환된다.

안전하고 중성화된 가정환경과는 대조적으로 , 이 남성은 하트 모양으로 다듬은 가슴 털 안에, 여러 개가 모여 아직은 젊은 육체 위에 일종의 관능적인 인간 고슴도치를 만들어낸 빨래집게들 속에 자신의 에로틱하고 자기애적 기반을 보존한다. 그래서 날개가 찢긴 아버지-예술가는 대신 상상의 나래를 펴서 부엌 한가운데, 그를 거세시키는 가족의 심장부에 있는 아득한 섬들을 향해 날아간다. 그리고는 단순하면서도 눈부신 마술 솜씨를 발휘하여 가족과 그가 당면한 환경을 자신이 꿈꾸는 꿈의 대상으로 바꾼다. 목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오히려 이점으로, 창조물로 둔갑한다. 그 결과 예술가와 가장, 체류나 항해냐의 모순은 해결 국면을 맞는다. 작품 속에서는 두 세계가 각자 가장 뛰어난 방식으로 공존한다. 비디오 언어의 거칠고 직접적이며 즉흥적이고 음험한 활력, 그리고 투자가 필요하고 고상하며 많이 시간이 요구되는, 영화라는 좀더 전통적인 언어가 그것이다. 이 둘의 결합 속에서 하나의 작품이 탄생한다. 아직 어느 목록에도 올릴 수 없는, 영화 초창기의 놀라운 경이와 마술, 기쁨에 다시금 생명력을 부여한 비디오-시네마가 태어나는 것이다.

 

Aya BEN-RON

 아야 벤론의 작품은 극동지역의 전통 회화와 서구 만화의 혼합이다 . 풍부한 이미지 언어를 통해 그의 작품은 강한 이스라엘 군대와 관련된 모티브들, 곧 부상병 돌보기, 끈끈한 유대, 죽음에 직면한 고통과 공포 등의 서사시적 연결망을 제공한다. 갖가지 의외의 상황에서 화면 가득 부상병들을 엎고 있는 군인들. ‘부상병'들의 얼굴 표정을 자세히 쳐다보면 애정 어린 행위에 자신을 맡기고 있는 연인의 얼굴이 아니라고 말하기 힘들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목가적인 풍경 속에 공포의 단서들이 마치 무슨 증거나 되는 양 곳곳에 퍼져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장식적인 미학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냉담한, 거의 유머에 가깝다시피한 공포의 기호들을 발견한다. 원자폭탄 때문에 돌연변이가 된 인간들, 바다에 떠 있는 백조 위에 널브러진 여자의 사체, 그리고 마치 여성의 질 풍경처럼 물 속에서 곧추 솟아오른 그녀의 죽은 연인 얼굴, 그리고 뒤틀린 희망의 상징처럼 눈 위를 비틀대며 걷는 두 쌍의 다리(!)를 가진 비둘기...

미적 공포의 스펙터클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고통과 쾌락을 본다 . 벤론의 주인공들은 씨름하고, 끌어안고, 쾌락과 맞닿아 있는 폭력을 행한다. 마치 우리는 링 안의 쌈닭들을 지켜보는 것처럼 그들이 눈, 콧구멍, 입술을 잃어버리는 것을, 성행위를 모방하듯 신체 구멍들에 손가락을 쑤셔 넣는 것을 본다. 이 모든 것들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시각적 방식과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침침한 물 속에서 야외복을 입은 맨발의 사내 두 명이 한 데 어울러져 우아하고, 관능적이며, 감동적인 춤을 추는 장면은, 동양풍의 장식성이 가미된 19세기 유럽 화보집의 분위기처럼 신비롭고 복합적인 층위를 지닌 아름다움 그 자체다.

 

Grisha BLUGER

이 작품은 타인에게 차용한 정체성과 인생사를 지닌 이민자들로만 이루어진 나라에서 , 많은 이민자들 가운데 어느 이민자가 들려준 한 이민자의 이야기이다. 다른 사람의 삶을 살고픈 욕망, 다른 종류의 인생 역정에 올라타고픈 욕망은 때로 용감하고 강박적이 될 수 있다... 영화 <젤리그Zelig>의 이 지역적, 예술적, 문학적 버전은 립시츠 벤 모르데차이Lipshitz Ben Mordechai의 말로를 그린 이야기로, 그는 1920년대에 상하이로 밀항해 들어와 샘 산제티Sam Sanzetti로 이름을 바꾼 뒤, 다시 방랑을 거듭하여 이번에는 근동의 이 고된 나라로 들어와 그 곳에서 쓸쓸히, 외롭게 최후를 맞았다. 그의 마지막 이름은 시미온 마르코비치.Simion Markovitch였다... 불루거는 이 이야기를 다양한 시각과 관점을 압축시켜 만든 자신의 ‘산제티화된' 판타지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야기는 원조 (불루거의, 나아가 립시츠, 산제티, 마르코비치의 이야기만큼이나 원조인) 중국제 성냥갑의 상표,  앙증맞은 글자와 이미지를 엮어놓은 경이로운 작품에서 시작된다 . 여기에는 또한 그의 삶에 대한 다큐멘터리적이고 역사적인 기록(사실 이것은 다큐멘터리인가?), 그리고 까탈스러운 쾌락에 몸을 담그고 중국 전통이라는 요새 속에 밀집한 남자와 여자들, 중국인과 백인들의 도시 상하이에 자리한 산제티의 작업실에 있던 그림들도 포함된다... 문학으로 재탄생한 산제티의 이야기(아마도 진실에 가까울?)가 공백들을 메우며 이야기의 매력과 신비를 더한다. 블루거의 판화작품들은 로맨스에 활력을 부여한다. 그는 파멸을 향해 치닫는, 그러나 마치 다른 시간대에서 온 듯한 축제 분위기로 충만한 촘촘하고 활기찬 구성 속에 이것을 포착한다. 이야기는 예술적 변형을 거친 ‘성냥갑 상표' 판화에서 끝을 맺는다. 이 판화들을 미래주의적 필치와 초기 러시아 아방가르드를 연상시키는 제국주의 시대 우표―서로 다른 시간대가 섞여있는 세계의 코드들―를 닮았으며, 과거를 향한 세련된 향수는 그 안에서 현재와 가능한 희망으로서의 미래를 발견한다. 그리고 이 안에서 블루거의 주인공은 그를 위해 잠시 동안 그 지평이 열렸었고, 아마도 이제 다시 열리게 될 동양으로 되돌아간다.

Tirtza EVEN

 악령에 들린 여인이 점점 빨리 움직이기 시작한다 . 분열증적 행동의 축소판처럼 두 손은 따로따로 움직이며 보는 이의 스트레스를 가중시키고, 구경행위는 결국 재빠른 ‘눈 깜빡이기'가 된다. 움직임이 더욱 속도를 더해 가다가 이윽고 그녀는 마침내 휴식에 빠진 듯 보인다. 인간이 내는 소리의 마지막 경계인 듯, 또는 박쥐의 비명인 듯, 신경을 긁어대는 거슬리는 기계적 소리가 높이를 더해가자 불쾌감과 악령의 느낌도 더욱 거세진다. 이 와중에서 에븐은 피사체를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으로, 그리고 놀라우리만치 선명한 비디오아트의 언어로 포착한다.  에븐은 시각과 청각을 극한까지 확장한다.

창문을 통해 가상의 이웃을 강박적으로 엿보는 밤 여행인 2부에서는, 아주 잠시 반짝인 후 곧 사라지는 창문들이 카드처럼 섞이다가 다음 이미지 속으로 사라지고, 다시 차례차례 다음 이미지들 속으로 녹아 들며 자취를 감춘다. 이 이미지들은 과부하가 걸린 두뇌의 환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벽 저쪽으로부터 웅웅대는 소리가 캄캄한 밤에 짤막하게 들린다. 에븐은 비디오 언어로 도시의 고독을 다룬 분위기 있는 시각적―음성적― 야상곡을 창조한다. 히치콕의 영화 <이창Rear Window>를 가득 메운 것도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3부에서는 스크린이 완전히 깜깜하다가 천천히 희미한 움직임이 종소리와 함께 어둠 속으로부터, 작가가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낮에 찍은 사진들에 입혀놓은 이 강제적인 밤, 디지털 암흑의 “미국적 밤”으로부터 감지되기 시작한다. 한 조각의 컴퓨터 프로그램 리얼리티는 주기적 매개적 행위로 , 아직 생명이 붙어있는 생명체들을 향해 거품처럼 일어 넘치는 유령 같은 풍경으로 바뀐다. 이 비디오 작업은 일종의 씨앗이다. 관람자가 자리를 뜬 이후에도 그들의 상상 속에 깊이 박혀 있는 것이다.

Doron LIVNÉ

도론 리브네는 예루살렘출신의 예술가이다 . 리브네 내면에 도사린 사명감 없고 세속적인 인간의 가벼움과 대비되는 그의 ‘예루살렘성Jerusalemness'은 마치 소명처럼 그를 강제하는 듯싶다. 이 점에서 출발하여, 그는 시각적인 것과 눈―배우는 눈, 가르치는 눈, 창조적인 눈―으로 읽히는 것을 분리하고, 동시에 그것들이 지닌 숨은, 포착하기 힘든 의미들의 관련 망, 날줄과 씨줄을 예루살렘 성벽의 사막 위에서 엮어낸다. 문화와 예술에 관한 개인적인 기억과 연상의 편린들이 단어와 이미지들의 조합 위로 던져진다. 리브네는 보기를 읽기로, 읽기를 보기로 분석한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에서 한 가지 본질적인 기본 요소가 그의 작품 전반에 개입된다. 그것은 그가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교육자를 겸하는 예술가 대부분이 두 영역을 분리시키는 것과 달리, 리브네는 교육을 작품으로, 물질적 창작을 반드시 교훈적일 필요 없는 수업으로 간주한다. 이는 관람자들의 새로운 이해를 도모하기 위함이다.

그가 보여주는 것은 모든 정거장이 서로 흡수되어 버리는 여행 , 어디서든 시작할 수 있고 딱히 정해진 시작도 끝도 없는 여행이다. 여기에는 오로지 리브네만이 떼었다 붙일 수 있는 ‘모듈'이라는 환상이 동반된다. 그가 다루는 것은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모국어에서 외국어로, 단어에서 이미지로, 그리고 다시 그 반대 방향으로)의 통과(번역)를 위한 비밀 주문이다. 때때로 그는 단어와 이미지들의 무덤을 판다. 리브네의 전시 “공생”에는 예츠겔의 책 일부를 필사로 적은 한 페이지가 함께된다. “그리고 나는 입을 열어 두루마리(메길라)로 배를 채울 것이다...” 사물로서의 신성함, 자양분으로서의 언어. 이것이 이스라엘 미술을 위해 가능한 공생이다.

Orit LIVNÉ

오리트 리브네는 사물에서 생명이 떠나고 정물 (죽은 삶)로 되돌아가기 전의 스치는 순간, 눈 깜짝할 사이를 생생한 드로잉으로 포착한다. 리브네의 고전적인 드로잉작품들은 이스라엘 미술의 내면에서 들끓고 있는, ‘잃어버린 유럽', 잃어버린 고전주의를 향한 동경을 부추긴다. 이것이야말로 거칠고 반항적인 이스라엘 존재라는 혼돈에 아름다움과 질서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들은 전통적인 드로잉이지만 아카데믹한 공허함을 넘어서고자 한다. 차분히 이어지는 일몰의 낮은 조명이 정물들을 비춘다. 누구든 그것을 만지고, 애무할 수 있다. 육체를 떠난 영혼처럼 인간존재는 사물들을 버려왔고 캔버스가 그 위를 덮었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마치 자신의 온기와 빛, 수의의 주름 주름에서 느껴지는 굴곡의 생생함을 뒤로한 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 결국 다시 사라진 성인처럼, 여기에 있다. 그것들을 기다리는 용기의 널찍함도 아름답고, 다른 정물의 가벼움과 대비되는 어느 정물의 무거움을 느끼며 빛과 그림자 만들기에 몰입했던 천 주름들의 관능도 아름답다. 한 입 베어 물리기를 기다리는 사과들 위로는 폭풍이 집결 하고, 잇달아 빛나는 어둠의 물결들은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도록 모여든 천사들처럼 빛난다. 이 천사들은 인간이 타락하기를, 한 입 베어 물기를, 폭풍의 암흑 밑바닥에서는 그의 몸뚱이 위로 이글거리는 빛이 내리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를 기다린다. 그 빛은 사과라는 제물로 추악한 것을 만들어내는 빛, 그릇―공허함으로, 공허함으로 충만한―은 텅 비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충만함을 과시하는 빛이다.

 
 




Romy ACHITUV

Yael BARTANA

Amnon BEN-A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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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ya BEN-RON

Grisha BLUGER

Tirtza EVEN

Doron LIVNÉ

Orit LIVN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