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 Hyunsuk
 
 
출생: 서울
거주 및 작업: 서울
 
   
Exhibition review
 
 
미술 비평가의 주제는 당연히 미술과 그 창작자들이며 우리는 비평가가 이러한 주제에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기대한다 . 그러나 서현석은 이러한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면서 비평적 눈과 비평적으로 관찰되는 것 사이와 관찰자와 관찰의 대상자 사이의 관계의 본질에 대해 질문한다. 그는 미술 비평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개의 독립된 이야기에 간결한 주석을 달고 주석을 통해서만 이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독특한 방식을 고안해내었다. 그는 이 “드러내지 않음”에 의해서 관찰자와 관찰의 대상물의 관계에 대한 질문들을 던지며 그 안에서 의미의 생산에서 ‘감추어진' 것의 역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다. 

서현석이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두 개의 일화는 인식의 균열에 의해 창조된 전치 , 뒤바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지각에 의한 분리/전치이다. 한 여인이 도심의 한 카페 창문에 비친 자신의 발을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의 발에서 거리로 나온 다람쥐의 환영을 본다는 내용이다. 두 번째는 문화적 분리/전치의 한 예이다. 주민들에게 민족학적 의미를 가지는 서울의 한 장소로서 그곳을 걷는 연인들은 반드시 헤어지게 된다고 하는 속설이 전해지는 곳인데 이 곳이 TV 드라마상으로는 프라하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설정된 한 장면의 무대로 사용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두 개의 이야기 모두 사물들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흐름 속으로 외부로부터의 침입이 유입되면서 유발되며 그러한 침입은 덮으려고 하지 않고 드러냄으로써만 다루어질 수 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후닥닥 지나가는 다람쥐의 이미지가 사실은 환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화자는 잠시 환영에 대한 불신을 보류한 채 만족스러운 상태를 유지하면서 의식적으로 자신의 비전을 지속시키려고 한다. (이와 비슷한 동기로 서현석이 자신의 주요 텍스트 속에 작가에 관한 캡션을 감추어 놓은 것이 명백하며 그 결과물도 그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두 개의 기둥 서술구조 속에 난 “균열”들이야말로 주된 이야기에 이미지와 아이디어를 부여하며, 읽기를 특징 지우고 읽기에 기대는 기억의 단편들을 제공한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한 장소의 전통적 의미에 접근하는 것을 부정하게 하는 방식을 통해서 익숙한 공공 장소의 정체성이 의도적으로 애매모호하게 된다. 

‘체계 속의 균열'에 대한 대조적인 반응들을 보여주면서 서현석은 글로벌리제이션과 그 효과에 대한 한국의 뒤섞인 반응이라는 더 큰 문화적, 사회적 현상에 대해 반영하는 것처럼 보여질 수도 있다. 한국 문화, 특히 젊은이들 가운데 한국 문화는 수입된 트렌드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 반면, 그러한 영향은 지역적 양식과 전통과의 협력 방식들에 의해 빠르게 흡수되고, 어느새 수입된 트렌드의 이질성과 신기로움 모두는 부정되어 버리는 보수적인 전략으로 다루어진다. 체계 안에서 균열을 만들어내는 똑 같은 힘이 균열들 속으로 흘러 들고, 기존의 전통은 균열들의 주변을 경직시키고 그들의 고유성을 감추어버린다. (이것은 아마도 언어에서 가장 명백할 것이다. 엄청난 양의 영어 단어가 한국말 속에 침입하고 있지만 영어 단어들은 한글과 한국말속으로 빠르게 흡수된다). 서현석은 주된 이야기 구조에 주석으로 균열을 내고 그 균열을 통해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방식을 통해서 한국 사회가 지니고 있는 상습적인 은폐의 위험과 감추어진 것들에 관한 기억과 흔적을 간직하는 것의 중요성에 관해 넌지시 말하고자 한 듯 하다.